조선 건국 과정, 고려는 왜 4년 뒤에야 끝났을까?

예전에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뒤 곧바로 조선을 세운 줄 알았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워낙 큰 사건으로 기억에 남다 보니, 그 이후의 과정은 짧게 이어진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다시 살펴보니 위화도 회군은 1388년, 조선 건국은 1392년이었습니다.
그 사이 고려의 왕이 바뀌고 토지 제도가 개편됐으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과 고려를 지키려는 세력의 갈등도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위화도 회군 이후 약 4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고려가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으로 바뀌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목차
- 위화도 회군 이후 왕이 계속 바뀐 이유
- 조선 건국 전에 과전법이 시행된 이유
- 정도전과 정몽주가 다른 길을 택한 이유
- 조선 건국 과정 핵심 정리
- 조선 건국 FAQ
- 고려의 마지막과 새로운 왕조의 시작
위화도 회군 이후 왕이 계속 바뀐 이유
우왕이 물러나고 창왕이 즉위하다
1388년 위화도에서 돌아온 이성계와 조민수의 군대는 개경을 장악했습니다.
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최영은 권력을 잃었고, 우왕도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우왕의 뒤를 이어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어린 왕이 정치를 주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누가 실권을 잡을 것인지를 두고 다시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회군을 함께했던 이성계와 조민수도 오래 같은 편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토지 개혁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커졌고, 조민수가 정치에서 밀려나면서 이성계 세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운 명분
이성계 세력은 우왕과 창왕이 고려 왕실의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운다는 뜻에서 이를 폐가입진이라고 부릅니다.
이 주장을 명분으로 창왕은 즉위한 지 약 1년 만에 폐위됐습니다.
이어 고려 왕실의 후손인 왕요가 공양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우왕과 창왕이 실제로 왕씨가 아니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왕을 교체하고 권력을 다시 짜기 위해 사용된 정치적인 명분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왕은 계속 바뀌었지만 실제 권력은 점점 고려 왕실에서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에게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 전에 과전법이 시행된 이유
나라의 이름보다 먼저 바뀐 토지 제도
고려 말에는 권문세족이 넓은 토지와 많은 노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한까지 일부 가문에 집중되면서 국가 재정은 약해졌고, 농민들의 부담은 커졌습니다.
이성계와 조준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는 정치만 바꾸어서는 고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기존 권력의 힘이 토지에서 나오는 만큼, 토지 제도를 먼저 손봐야 했습니다.
1391년 공양왕 때 시행된 과전법은 국가가 수조권을 다시 정리한 뒤 관리의 등급에 따라 나누어 주는 제도였습니다.
여기에서 수조권은 토지를 직접 소유하는 권리가 아니라, 그 토지에서 일정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 기존 권력의 기반 약화: 많은 토지와 수조권을 차지했던 권문세족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습니다.
- 새로운 관료층의 성장: 신진 사대부가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 국가 재정 정비: 개인에게 흩어진 세금 징수 권한을 국가가 다시 관리하려 했습니다.
- 새 왕조의 기반 마련: 조선을 이끌 새로운 정치 세력이 현실적인 힘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과전법을 시험에 나오는 토지 제도 정도로만 기억했습니다.
이번에 조선 건국 과정과 연결해보니,
나라의 이름이 바뀌기 전에 권력을 움직이는 경제적 기반부터 달라졌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배경은 한국사 카테고리의 1회차 기록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역사적 맥락
과전법은 관리에게 토지 자체를 나누어 준 제도가 아닙니다.
국가가 관리에게 일정 지역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지급한 것으로, 토지의 소유권과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정도전과 정몽주가 다른 길을 택한 이유
처음부터 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모두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였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무너진 고려의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도 같았습니다.
정몽주는 공양왕을 세우는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처음부터 이성계나 정도전과 반대편에 서 있던 인물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개혁의 끝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두고 생각이 갈렸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왕조를 끝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지만,
정몽주는 고려라는 나라 안에서 개혁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몽주를 단순히 조선 건국을 반대한 보수적인 인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 역시 고려를 바꾸려 했던 개혁가였습니다.
바꾸려는 마음은 같았지만 나라를 끝낼 수 있는지를 두고 선택이 달랐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죽교 사건으로 사라진 마지막 견제 세력
공양왕 말기 정몽주는 정도전 등 새로운 왕조를 주장하는 세력을 정치에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이성계가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해 다치자, 건국 세력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온 뒤 정몽주를 회유하려 했지만 뜻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결국 1392년 이방원 측 인물들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했고, 고려를 유지하려던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세력이 군사적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 1389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 1391년: 과전법이 시행되며 기존 권력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렸습니다.
-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고 공양왕이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 새 왕조의 시작: 이성계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 역사적 맥락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두 사람의 선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두 사람이 실제로 그 자리에서 시조를 주고받았는지는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와 당시 기록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 과정 핵심 정리
위화도 회군부터 조선 건국까지의 흐름
| 항목 | 내용 |
| 1388년 |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이 실각하고 우왕이 폐위됨 |
| 창왕 즉위 | 우왕의 아들 창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약했음 |
| 1389년 |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움 |
| 1391년 | 과전법을 시행해 토지 제도와 정치 세력의 기반을 바꿈 |
| 1392년 | 정몽주가 피살되고 고려를 지키려는 세력이 약해짐 |
| 공양왕 폐위 | 공양왕이 왕위에서 물러나며 고려 왕조가 끝남 |
| 이성계 즉위 | 신하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새로운 왕조가 시작됨 |
| 1393년 |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으로 정함 |
연도 기준 안내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해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1392년입니다.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한 것은 이듬해인 1393년이므로 두 연도는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조선 건국 FAQ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때부터 왕이 될 생각이었나요?
회군 당시부터 새로운 왕조를 세울 계획이 완성돼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회군 이후 왕위 교체와 토지 개혁, 여러 정치 세력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건국의 방향이 점차 뚜렷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몽주는 개혁을 반대한 인물이었나요?
정몽주도 고려 사회의 문제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개혁가였습니다.
다만 고려 왕조를 없애는 것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를 주장한 정도전과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은 1392년에 세워졌나요, 1393년에 세워졌나요?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 왕조가 시작된 해는 1392년입니다.
‘조선’이라는 국호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1393년이어서 두 연도가 함께 언급됩니다.
고려의 마지막과 새로운 왕조의 시작
고려가 무너진 이유를 정몽주의 죽음이나 공양왕의 폐위 하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약해진 왕권과 권문세족의 토지 집중, 새로운 관료 세력의 성장 같은 문제가 오랫동안 쌓여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그 변화를 빠르게 움직이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왕이 바뀌고 과전법이 시행되면서 고려를 지탱하던 정치적·경제적 기반도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조선 건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과전법 자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양왕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조선 건국을 몇몇 인물이 빠르게 결단해 새로운 시대를 연 이야기로 기억했습니다.
실제 흐름을 살펴보니 고려의 마지막 4년에는 왕위 교체와 토지 개혁,
같은 시대를 다르게 바꾸려 했던 사람들의 선택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1392년 공양왕이 물러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새 나라의 이름도 수도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다음 기록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왜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026년 기준 안내:
본문의 사건과 연도는 공개된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우왕과 창왕의 혈통, 건국에 참여한 인물들의 의도,
정몽주 피살을 둘러싼 세부 내용은 사료의 성격과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과전법이 1391년 시행돼 새 왕조의 경제적 기반이 됐다는 점과 공양왕 재위 중 이루어진 개혁, 1392년 태조 즉위 및 1393년 국호 변경을 공식 역사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